순이네 집

1968년 가을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2단지에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가 열렸다. 오늘날 가산동 일대였다. 300여 개의 국내 기업 및 100여 개의 해외 기업이 참여하였다. 42일 간에 걸쳐 열린 박람회장에는 200만 명의 관람객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였다. 국가적으로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으로 경제 성장을 이룰 신호탄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구로공단은 1971년에 10억 달러의 수출 기록을 달성하였고 80년대에 이르러 전자기기 생산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90년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구로공단은 서울의, 더 나아가서는 나라의 산업 구조와 경제 성장을 거울처럼 비춰왔다. 좀 더 비추지 못한 것이 있다면 성장의 이면에서 함께 성장통을 나눠온 청춘들이었다.
당시 청춘들은 '공순이'로 통했다.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는 늘 타인이 붙여주었듯, 그들을 칭하는 용어도 사회가 붙여준 것이었다. 청춘들은 컨베이어벨트나 미싱 앞에서 기꺼이 젊음과 성장을 맞바꾸어 국가라는 거대한 살림이 굴러가게 하였다. 이들은 동정을 바라지 않았고, 오로지 인간다운 삶만을 바랐다. 공부하고, 또래와 어울려 놀고, 꿈꾸며 더 나은 삶을 갈망했다. 벌집, 닭장, 토끼장으로 통하던 어느 외딴 방에서.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공간인 &금천 순이의 집&을 찾으면 나라의 살림을 굴리고 불려갔던 청춘들의 외딴 방을 엿볼 수 있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벚꽃로44길 17) 벌집은 말 그대로 벌집 같았다. 한 집을 불법 증축하여 30여 개의 방을 만드는 식이었다. 1972년 가리봉동 113-25번지의 2층 집에서는 약 180명의 거주자가 단 5개의 변기를 함께 사용했다. 금천구에 거주하며 구로공단 노동자로 지냈던 신경숙은 자전적 소설 『외딴방』을 통해 그 시절을 생생히 기록했다. 고달픈 노동자와 학생이라는 신분을 위태롭게 오가며 이름 대신 작업 번호로 불리던 때였다.
G밸리로 탈바꿈한 가산동 일대는 오늘날 첨단 산업과 수많은 청년 직장인들이 모이는 대한민국의 대표 산업단지가 되었다. 산업의 모습은 달라졌지만, 이 공간이 수많은 청춘의 노동 위에서 성장해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높은 빌딩과 현대식 사무실이 들어선 자리에도 한때는 꿈을 품고 상경한 청춘들의 외딴 방이 있었다. 오늘의 G밸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공간인 동시에, 산업화 시대를 견뎌낸 청춘들의 삶을 함께 기억해야 할 장소이기도 하다.